옛날 클 때 이야기
– 밴쿠버에서 돌아 본 내 인생의 오솔길
2004년 2월 26일
류 정 옥
I.
<어린 시절부터 (1934년)–첫 살림 나가기까지 (1957년)>
나는 닭띠 해인 음력 1933년 섣달 스무 날 (양력 1934년 2월 3일), 경남 거창군 주상면 거기리 외장포에서 문화 류씨 재자 수자를 쓰시던 아버지와 최씨 성을 쓰시던 어머니의 팔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우리네 자랄 때는 왜정 시대였고 생활이 곤란했기 때문에, 오빠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자 형제들 두 사람을 함께 학교에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맏이였던 언니와 둘째 딸인 나는 제쳐놓고 큰 아들인 오빠와 함께 내 밑의 동생을 학교에 보내기로 하여, 동생의 입학 원서를 넣었다. 그랬는데 동생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를 안 간다고 거부를 해서 내가 대신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내 나이 10살이었다.
그 시절에는 쌀이 귀해서 생활이 어려운 집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점심을 주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교서 밥을 먹고 집에 와서 또 밥을 먹는 날이면 막내 삼촌이 나서서 야단을 치기도 했다. 삼촌은 해방 직전에 일본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는데, 나중에 분가해서 따로 살게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을 해서 4년 째 되는 해인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다. 그 때 내 나이가 14살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일본 글을 3년 반 정도 배우다가 그만 둔 셈이다. 해방 되고부터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부모님이 학교를 더 이상 못 가게 해서 나는 결국 공부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 났고, 형제가 8남매나 되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공부는 더 이상 꿈도 꾸지 못했다. 그냥 집에서 일만 하다가 시집을 가기에 이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공부를 더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다.
내 나이 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1950년 육이오 사변이 났다. 사변 나고 노처녀들을 모집한다고 하는 소문이 나고, 또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흉년이 잘 지는지 내가 결혼 할 때까지 내리 삼년 흉년이 이어 졌다. 내가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 중 하나도 흉년 때문이었다. 중매쟁이가 부모님께 흉년 들 때는 입 하나라도 덜면 낫다고 부추겨서 결국 나를 시집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 열 여덟 되던 해에, 같은 면이지만 우리 집에서 십리길 떨어진 주상면 도평리에 사는 백명인의 처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주상국민학교 다닐 때 남편이 학교의 급장이었기 때문에 동네 사는 오빠를 통해서 들어서 이미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선보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우리는 선도 보지않았고 사성이라는 것을 보내오는 것으로 혼약을 대신했다. 나는 사성이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중매쟁이가 가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집 안 간다고 울고 불고 했더니 할머니가 딸도 많은데 이미 들어 온 사성 보따리를 돌려 보낼 수 없다면서 마구 야단을 쳐서 그냥 서럽게 울며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나는 식구 중에서 할머니와 아버지가 가장 무서웠다.
사변 나던 그 해인 1950년 음력 8월에 인민군들이 거창을 비워두고 무주와 남하 방면으로 철수를 했다. 그 때 집안의 아제 뻘인 재철의 형님인 재화 아제가 주상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끌려가서, 남상 어디에선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재화 아제를 인민군이 데려갔는지 국군이 데려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었는데 찾지를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민군이 철수하고 난 때인 1950년 음력 11월 24일로 나의 결혼식 날짜가 결정 되었다. 양력은 1951년 1월 1일이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고도, 신부는 1 년 동안 친정에 머물러 있다가 시댁으로 가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래서 결혼 후에 1년 동안 신랑이 내가 있던 친정으로 다니러 왔는데, 신랑이 친정으로 와도 부끄러워 한 방에 앉아 보지도 못했다. 그 때 신랑은 지서에 전투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 서로 한 면에 있었기 때문에, 1년 동안 자주 오기는 했지만, 당일 왔다 돌아가면 얼굴도 못 볼 때가 많았다. 부끄러워서 낮에는 한 방에 앉아 보지도 않았으니 1년이 되어도 신랑 얼굴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신랑이 친정에서 자고 가는 날에도 오빠나 언니가 나의 손을 끌고 방으로 데려다 주어야만 들어가곤 했다.
일 년을 두고 신랑이 가끔 한번씩 친정으로 찾아와서 만나다가 결혼한 이듬 해에야 시댁으로 시집을 가려고 날을 받게 되었다. 음력 12월 4일 날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청천 벽력처럼 아직 6.25 사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말 신랑에게 군대에 입영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입대할 날을 사흘 앞두고 신랑이 친정으로 다니러 왔었다. 하루 밤을 친정에서 자고 가려고 왔는데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낮 동안 한방에 앉아 보지도 못했다.
신랑이 군대 간다고 떠나가는 날에도 결혼은 했지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집결지인 주상면까지 나가 볼 수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시집을 가지 않아도 당당하게 같이 따라갔을 터인데, 밤새도록 애만 태우고 있다가, 아침에서야 엄마가 오늘 떠나는 거나 보고 오자고 주상면까지 가 보자고 해서 어머니와 같이 갔다.
주상면까지 십리 길을 걸어가는데 중간쯤 가니까 군대 가는 사람들이 한 차 가득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차 속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서 길 밑으로 뛰어 내렸다. 그 사이에 트럭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차에 타고 가는 사람 얼굴을 못 봤기 때문에 신랑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을 거라고 하였지만 엄마는 차에 탄 신랑을 봤다고 했다. 그렇지만 확인이라도 해 보자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주상면쪽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군대 가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내려오던 사람들이 조금 전에 차가 떠나 갔다고 알려 주었다. 그제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보는 사람마다 어제 시집으로 따라가지 왜 안 갔었느냐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어머니도 내가 왜 너를 어제 보내지 않았을까 하며 후회를 하셨다.
결혼 후 일년 동안 친정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 집과 시집이 한 면이기 때문에 시어머니에 대한 온갖 소문이 들려왔다. 시어머니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시댁의 형제가 7 남매인데 나를 중매한 중매쟁이가 6남매라고 속여서 중매를 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느덧 시집으로 가기로 날을 받아놓은 두 달이 다 되어서, 음력 12월 4일 신랑도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야 했다. 시집가기 전날 밤에 비와 눈이 뒤섞인 진서(진눈깨비)가 와서 신랑도 없이 시집을 가는 내 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땅바닥이 몹시도 질고 발을 디디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시어머니는 호랑이 같다고 소문은 났지, 신랑도 없는 시집을 가는데다가, 7남매 맏이의 집에 가서 과연 내가 어찌 살아야 하는지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저절로 났다.
옛날 풍습에 의하면 시집을 가려고 방을 나설 때는 울면서 부엌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부엌으로 문을 열고 나가서 부엌의 솥 뚜껑을 마지막으로 잡아 보고, 또 부엌 바닥의 요강에 앉았다가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시집가기 싫다고 부엌 문을 잡고 안 나간다고 울면서 문간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언니가 내 팔을 누르는 바람에 손을 놓게 되었다. 울면서 가마를 타고 가는데 아버지가 사돈집 가서 입을 도포를 접어서 가마 안으로 들여 주었다. 하지만 나는 우느라고 그것을 미처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리막길로 내려 가다가 타고 가는 가마의 문이 열려서 아버지 입으실 도포가 눈비 내려 젖은 땅바닥에 떨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야단을 치셨는지 모른다. 시집에 가서 예식을 치르려면 아버지의 도포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 가서 오촌 당숙의 도포를 빌려 왔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십리 밖에 있던 시집의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었다.
7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동네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한 날 시집 오는 사람이 세 집이나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미신을 지키느라고 한 날 시집을 오게 되는 경우 남보다 먼저 시집에 들어가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더러 일찍 오라고 했다. 그래서 세 집 중에 가장 먼저 시댁에 도착을 하여 앉아있는데, 친정 집안 쪽으로 언니 되는 이가 나에게 와서 저 어느 집에는 신랑이 군대 갔다가 신체검사에서 떨어져서 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 소식을 들으니 다시 눈물이 흘렀다. 헌데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는지 시어머니가 호랑이가 소리지르듯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호령을 했다. 시집오기 전부터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라고 소문은 들었지만, 어찌나 무서운지 정말 놀랐다. 그 친척 언니는 놀란 나머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집살이가 시작되어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시어머니가 너무나 무서웠다. 신랑도 없이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항상 가슴이 조마조마 했었다. 12월에 시집을 왔는데 설 쇠고 2월이 되었을 때였다. 강아지 한 마리가 어디서 약을 먹었는지 죽었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소리소리 지르셨다. 집안 형님들은 그냥 시어머니가 정말 무섭다는 말만 했다.
시어머니는 내 결혼 하던 해에 막내 시누이를 낳았다. 나는 시집가서 6년 동안 애기가 없었기 때문에 막내 시누이를 내가 키우다시피 했다. 시집에 신랑이 없으니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들도 다같이 한방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하다 8개월 만에 신랑이 처음 외출을 왔었다. 육이오 사변 난 직 후라 불도 제대로 못 켜게 하기 때문에 깜깜한 호롱불을 키어놓고 친구들과 길쌈 한다고 삼을 삼고 있는데, 밤이 이슥할 무렵 신랑이 지서의 친구들 세 사람과 같이 들어왔다. 머리에는 철모를 쓰고 총도 메고 또 배낭까지 짊어 지고, “어머니!”하면서 집으로 들어 왔다. 시누이 친구와 우리 친구 하고 네 사람이 앉아있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보니 신랑이었다.
마루에 주무시는 시어머니께 일어나시라고 하고, 또 사랑방에 가서 시아버지께 급한 나머지 작은 아씨 오빠가 왔다고 말씀을 드렸다. 시아버지도 얼마나 급했는지 주무시다가 혁대도 매지않고 옷을 잡고 나오셨다. 밥지을 때가 되면 시어머니가 밥쌀을 내주고 밥도 퍼주고 했는데, 그날 밤에는 나더러 직접 쌀을 퍼서 밥을 하라고 하기에, 야단맞을 까봐 쌀은 조금하고 생 보리쌀을 많이 넣었다. 신랑이 오니 떨려서 경황없이 밥을 하는데 시아버지가 솔가지 불을 때주었다. 그렇게 급하게 밥을 했더니 밥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래는 삶은 보리를 써야 하는데 생 보리쌀을 많이 넣고 잘못 지어진 밥을 먹고 나서 신랑은 그만 배탈이 나고 말았다. 친구들은 근무하다 왔기 때문에 밥도 먹지않고 갔다. 작은집 큰집에 신랑이 왔다고 연락했더니 다 와서 반갑게 놀다 갔다. 신랑과 함께 대문 밖에 같이 나가서 손님들 잘 가시라 하고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10월 달에 만나고는 시집간 이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그 날이 음력 7월 17일 밤이었다.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돼지우리 지붕에 박꽃이 피어 있어 그 꽃을 만지고 있으니 남편이 들어 가자고 하면서 먼저 들어갔다. 시집에 가서는 첫날 밤이었다.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아서 서로 자라고만 하고는 밤을 꼬박 세웠다.
남편은 4 일간 외출 나왔었는데 오는 길에 타올(수건)을 여러 장 가지고 왔다. 그 때는 타올이 얼마나 귀했는지 시누이들도 주고 집안 친지들에게도 나눠주고 친정가면서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타올을 친정에 갔다 주었다고 야단을 치고 친정에 갔다 온 후로도 계속 화를 내셨다. 시집 올 때에 군대 가고 없는 신랑 모시 두루마기를 아니해 왔다고도 하고, 예단을 적게 해왔다고 하면서 모진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렇게 시집을 살면서도 친정 어머니에게 말대꾸를 못해보고 살아왔다.
8월이 되어서 밭에 고구마를 캐러 갔는데 시아버지가 밭에 계시기 때문에 남에 밭에 소변을 하고 왔더니, 남의 논에 거름 주고 왔다고 시어머니가 야단을 치셨다. 옛날에는 거름도 귀하기 때문에 소변도 꼭 자기 밭에 보곤 했다.
그 고구마를 캐다 놓은 다음 날 밤에 길쌈 할 거리를 가지고 이웃집에 가서 일을 하다가 고구마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우리집에 고구마 많이 캐다 놓았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그걸 좀 깎아 먹자고 농담조로 얘기를 꺼냈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무서워 하면서도 정말로 나와 다른 두 친구가 그걸 가지러 갔다. 두 사람의 치마 앞 자락에다 고구마를 조금씩 싸서 가져와 방바닥에 붓는 순간, 바깥에서 “이 년들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어머니의 그 소리에 천지가 내리 덮치는 것처럼 놀랐다. 온 방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다 놀라서 일도 못하고 조금 있다가 헤어졌다. 그 고구마는 집안 아지매 (아줌마)와 같이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아지매는 돌아 가셨다. 신랑이 없으니 어린 시동생들과 시누이들과 한 방에서 다 같이 자는데, 잠자리에 들어가 누웠지만 밤새도록 잠 한숨 못자고 밤을 새웠다. 시어머니가 무섭다 해도 그렇게 무서운 줄 모르고, 친정 엄마처럼 생각하고 갔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서부터 시어머니가 매사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간장을 누구 퍼다 주었다고도 하고, 무명 길쌈 하면서 실 빼 놓은 것도 누구 주었다고 하고, 나중에는 시아버지 삼베 중우 (속옷) 까지 엿 사 먹었다고도 했다.
시집가던 다음 해에 친정 동네에서 동 민이 모두 모여서 1년에 한번씩 하는 회치 (놀이 모임)을 하는데, 여동생 둘이 오후에 우리 집에 와서 자고 나를 데리고 친정에 같이 가려고 왔는데, 시어머니가 밤새도록 얼마나 야단을 치는지 동생들이 잠 한숨 못자고 그대로 있다가 새벽에 울면서 돌아갔다. 동생들이 시어머니 욕을 하면서 가다가 뒤를 돌아 보니 시아버지가 논 두렁에 거름을 지고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결국 친정 나들이는 못하고 말았다.
시집가서 몇 년 지나고 나서 친정 오빠가 부산에 살면서 집에 다니러 왔다고 해서 친정을 갔다. 오빠는 그 때 라디오라는 것이 나왔다 하면서 라디오를 사 왔었다. 친정에 도착하니 마당에다 멍석을 펴 놓고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와 있었다.라디오를 처음 보니 너무나 신기했다. 시집에 돌아 와서 무우밭에 갔을 때 시어머니에게 라디오 이야기를 했더니, 무슨 그런 기계가 있을까 하면서 좋아했다.
그러다가 시동생에게 군대 영장이 나왔는데, 면 직원들이 영장을 가지고 와서 도장을 달라고 해서 도장을 주었더니, “시동생 군대 보내려고 도장을 주었다”며 얼마나 야단을 치는지 시동생 제대하고 올 때 까지 원망을 했었다. 그 때 나는 머리를 길러 쪽을 찌고 있었다. 아침에 머리를 빗으면 “신랑과 시동생 죽으라고 머리 풀고 있다” 하고, 낮에 머리를 빗으면 “어느 놈 반하라고 빗느냐”고 말했다. 다른 말은 다 해도 괜찮지만 무고한 나를 트집잡는 소리 하는 것을 들으면 몹시 분했었다.
결혼한 몇 년이 지나도록 애기도 없이 일만하니, 일 못한다는 말은 듣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베 짤 때는 참을 가져 다 주기도 했다. 길쌈으로 베를 많이 짰다. 문을 열어놓고 명주 베를 짜면 시아버지는 마당을 지나가시다가 한참 서서 쳐다보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아들 딸 7남매를 키우고 나니 자식이 부럽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6년이나 애기가 없으니 남들이 애기 없다는 이야기를 할라 치면, “지섬씨 (풀 씨)도 씨가 있는데 씨 없을까 봐”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다가 결혼한지 6 년 만에 애기를 갖게 되었다.
농촌에 살다 보니 애기 낳는 바로 전 날에도 들에 가서 모를 심었고, 애기 낳는 날도 하루종일 모를 심었다. 오전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모를 들고 심다가 또 쉬었다가 심곤 했다. 저녁 때가 다 되어서 시어머니에게 배가 아프다 했더니 “달이 찾기 때문에 아픈 게지” 하시길래, 그대로 참고 늦게까지 모를 심고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나니 다시 배가 아팠다. 버선을 깁던 중이어서 다 기워 놓고 나서야 애기를 낳게 되었다. 애기를 낳은 것은 한 밤중이었다.
애기 낳은 다음날, 냇물에 가서 빨래도 하고, 그리고 사흘 만에 온 식구들이 모 심는다고 나가서 밥을 해서 시누이에게 이여 보냈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지 6년 만에 낳은 애기가 사흘이 되던 날부터 울기 시작하고 손발의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옛날 시골에서는 애기가 아파도 병원에 갈 줄도 모르고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심하게 앓다가 결국 10일 만에 애기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애기가 죽은 다음 날부터 또 모를 심으러 나가야 했다. 젖이 불어서 엎드려 모를 심는데 팔이 너무나 아팠다. 그렇게 아파도 신랑이 없으니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지냈다. 비가 오면 땅에 묻은 애기에게 물이나 들어가지 않나 싶어, 비만 오면 눈물이 났다. 애기 죽고 며칠지나서 애기 아빠가 휴가를 나왔다. 남편은 6 년 만에 낳은 애기를 보지도 못해서 누구를 닮았더냐고 묻기만 했다. 애기 아빠는 너무나 속상해 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내고 나니 애기를 낳고 모를 심어서 그런지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여자는 병이 나면 친정에 가서 고쳐야 한다”며 나에게 친정으로 가라 했었다. 그렇지만 추수 철이 다가오니까, “가을하는데 안 온다”며 친정 동네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말을 했다. 그래서 결국 아픈 허리를 안고 시집으로 돌아갔다.
시집살이 할 때 남편은 일년에 몇 번씩 휴가를 왔다. 그러다가 둘째 애기를 가졌을 무렵 시어머니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제 너희도 살림해도 된다고 하더라!” 하면서 집을 나가라고 했다. 신랑이 휴가와 있는데 시어머니가 휴가 온 사람을 따라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어 같이 길을 나섰다.
음력 2 월인데도 강원도에는 눈이 많이 와서 눈 사태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애기를 가져서 그런지 날씨는 더욱 춥게 느껴져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김천에 사촌 시누이 한 분이 있어서, 그 시누이 집에서 자고 다음날 김천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시집갈 때 머리를 쪽 지은 상태였었는데 김천에서 처음으로 머리에 퍼머를 했다. 그곳으로 가능 길이 얼마나 추웠는지 신랑이 자기 입던 야전 잠바를 나에게 입혀 주었다. 서울에 도착 해서 강원도 춘천까지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갔다.
살림을 나간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가 휴가 온 사람을 따라 갔으니 갈 데가 도무지 없었다. 결국 남편은 자기가 잘 다니는 문관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밤에 그 집으로 들어가니 문관 아저씨는 처가에 가고 없었다. 남편은 나에게 일단 그 집에서 자라고 하고 부대에 들어 갔다. 나는 시골에서 차를 많이 안 타봤기 때문에 그렇게 먼 길은 처음 가는 것이었다. 서울서 춘천까지 가는데 워낙 길이 험하고 차를 오래 탔기 때문에, 밤에 앉아 있으니 아직도 차를 탄 듯 내 몸이 흔들흔들 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니 이렇게 멀리 오면서 엄마 집에는 연락도 없이 왔는데, 이제는 엄마도 못 보겠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그 시절에는 전화도 없고 한 면이라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고는 지난 밤에 부대에 들어간 남편이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나왔다.
그래서 어쩌나 하고 있으니 윗동네 마을에 백씨 한 집이 산다고 하면서 그리 가자고 했다. 어떤 집이냐고 물었더니 남편의 일가 집인데 자주 왕래하던 집이고 늙은 할머니도 계신다면서 가자고 했다.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집이라고 부엌은 하나였고 방은 두 개 였지만 두 방이 아래 위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판에 문도 따로 없는 방이었다. 한 부엌에 불을 넣어 아래 위를 동시에 통하는 내 고래로 되어 있었다. 그래도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서 가운데 문이 없으니 부대 담요를 가려 놓은 채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집에서는 따스운 방에 자도 혼자 자니 추워했는데 신랑과 함께 자니 이불도 없이 방에 불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담요 한 장만 덥고 자도 추운 줄 모르고 지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강원도 춘천 샘 밭에 있는 2군단 사령부 근처였다.
한 번은 시내에 외식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처음 외식을 하면서 설렁탕을 먹게 되었는데 상 위에 설탕이 놓여져 있길래 한 숟갈 떠 먹었는데 먹고 보니 소금이었다. 남편은 “웬 소금을 그렇게 많이 먹어?”라고 물었다. 설렁탕을 처음 먹는 것이라 소금이 그곳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해서 그렇게 먹었지만 그 때만 해도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했다.
그렇게 일가집에서 6 개월을 살았다. 어느덧 애기 낳을 때 가 되어서 윗마을로 이사를 했다. 주인 아저씨는 집에서 이발사를 했는데 어찌나 짓궂었는지 이웃 할아버지들 이발을 하면서 한복판에 있는 머리는 깍지 않고 남겨 놓았다가 집에 가서 거울을 보고 다시 오면 놀리곤 했다. 얼마나 우스운지 참 많이도 웃었다.
이사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애기를 낳았다. 그것이 혜숙이었다. 옛날에는 한집에서 두 사람이 애기를 안 낳는 법이라면서 주인 아줌마가 봄에 애기를 집에서 낳았으니 그 집에서 낳으면 안 된다고 해산 며칠 전에 이웃집에 부탁을 해 놓았다. 밤에 애기 낳을 기미가 있어서 옆집으로 애기 낳으러 가면서 이사 가는 것처럼 짐을 챙겨야 했다. 밤에 가서 애기를 놓았다. 애기 낳은 뒤 3 일만에 집으로 돌아 왔다.
첫 애기는 6 년 만에 낳아서 자기 아버지도 못보고 죽고 다시 애기를 낳으니 저희 아버지는 정말 좋아했었다. 애기 낳은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남편이 제대를 하게 되었다. 다시 시집으로 들어가야 하나 어쩌나 고민을 하다가, ‘이제는 괜찮겠지’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집 갈 때 신랑 모시 두루마기 안 해 왔다고 그렇게 시집을 살았기 때문에 제대하고 돌아 가면서는 모시 한 필을 사 가지고 갔다.
시어머니는 모시를 보고도 반가와 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들어 간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집 나가더니 얼마 살지도 못하고 왔다”며 며느리를 미워하면서 나중에는 애기까지 미워했다. 제대로 업어 주지도 않아서, 보리밭에 가서 지섬 (풀)을 맬 때면 겨울 보리밭에다 8월 달에 낳은 애기를 뉘어 놓고, 보리밭 풀을 덮어 주기도 했다. 설쇠고 나서 애기 아빠는 부산으로 직장을 구한다고 가더니 몇 개월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 시절에는 세상 사람들이 군대가지 않으려고 돈도 쓰고 할 때였는데 직장도 못 잡고 해서 재복무를 하기로 했다고 연락이 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안 가려고 하는 군대를 다시 간다 하니 나는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상했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남편이 다시 군대에 가고 난 뒤 몇 달 안되어 또 시작되었다. 남편이 제대하고 올 때에 집에 가져온 옷이 없어 졌다고 “시동생들 입을까 봐 어느 놈을 갔다 주었느냐”고 구박을 했다. 그 동안에 친정에 갔었더라면 친정 갔다 주었다고 할 터인데 친정을 가지않았기 때문에 친정 말은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시동생을 시켜서 군대 있는 아들에게 시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빨리 오라고 전보를 치라고 해 놓고 고악의 시이모님 댁으로 가 버렸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동생 집에 가면서도 밥지을 쌀을 미리 푸다가 내놓고 갔다. 나는 그 쌀을 직접 푸지 않고 시누이에게 밥지을 때마다 내 달라고 했다. 7년 동안 시집을 살았는데 그 기간 내내 시어머니가 쌀을 내주고 밥도 퍼주었다.
전보를 받고 군에 있던 남편이 외출을 왔다. 영문도 모르고 집에 돌아온 남편은 나만 야단을 쳤다. 비가 오는데 군복을 벗어 놓으면서 빨아서 저녁 때 입고 가게 하라 했다. 비가 오는데 냇물에 가서 군복을 빨아다가 처마 밑에 걸어놓았지만 마르지도 않는다. 옛날에야 세탁기도 없었지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은 시동생에게 “너도 군대를 갔다 왔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느냐” 야단을 쳤다. 다음날 애기는 시누이에게 보라고 하고 나는 콩밭을 매러 갔는데 조금 있으니 남편이 밭으로 왔다. 같이 김을 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했다. 김을 매느라고 점심도 먹지않고 저녁때가 되어서 집에 오니 시어머니가 들어 오셨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절을 하니 “나는 부모가 아니다”라며 절도 받지 않고 돌아 앉았다. 다음날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나를 데리고 가라고 야단을 하니 남편은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 뜰에 있는 신발을 들고 길쌈 한다고 삼을 찢고 있는 나의 얼굴을 때려 코피가 나도록 했다. 그렇게 야단이 나도 시아버지는 사랑방에 계시면서 시어머니 겁이 나서 내다보지 않았다.
코에서 피가 쏟아 지니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가 너무 많이 나오니 누워도 목으로 넘어 왔다. 그 날 밤을 자고 이튿날 아침 남편은 “가다 죽든 살든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애기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나섰다. 우리가 집을 나서는 것을 보며 시어머니는 “같이 가다가 차에 갈려 죽으라”고 외쳤다.
갑자기 집을 나가려고 하니 돈이 없었다. 이웃 집에 가서 남편의 월급 타서 부친다고 빌려 달라 하니 시어머니 무서워서 못 빌려 준다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대하며 돌아 올 때 사온 모시 한 필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김천 사촌 시누이 집에 도착하여 애기 젖 주려고 내려다 보고 있는데 또 코피가 쏟아졌다. 시누이와 시아주버니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집에서 나오기까지의 얘기를 했다.
코피가 멎자 김천 시장 포목 집에다 모시를 팔았다. 그 때 돈 3천5백원에 산 모시를 3천원에 팔 수 있었다. 시누이 집에 돌아온 뒤 새벽 2시에 기차를 타고 김천을 떠났다. 그때는 김천서 서울까지 7시간이 넘어 걸렸다. 서울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양구까지 갔다.
전보를 받고 외출 온 사람을 따라서 정처 없이 집도 절도 없이 가는 길이라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남편은 12사단 52연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양구 읍에서 남면까지 가는 동안은 텐트를 친 군인 트럭에 애기를 안고 탔다 그 때가 음력 6월 달이라 얼마나 더운지 차를 타고 가는데도 계속 땀이 흘렀지만, 군용트럭에는 민간인들이 못 타게 되어 있어서 검문소 앞을 지나갈 때는 애기가 울까 봐 입에다 젖을 물리며 숨 죽이고 있었다.
12사단 앞의 남면 삼거리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춘천 샘 밭에서 세 들어 있을 때 뒷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가 춘천 살 때에 멀리 농사지으러 다닌다고 말을 하곤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양구로 다니고 있었다. 양구 남면 삼거리의 그 아줌마 집으로 며칠
신세지기 위해 갔다.
II.
<1957년 양구에서 – 혜미 분가까지>
옛 이야기처럼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아줌마와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어서 방 얻을 동안 그 집에서 사흘을 있었다. 애기까지 있는데 그렇게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지 이사를 가서도 부모처럼 생각하면서 다니러 가곤 했다. 그 아줌마의 집은 12 사단 본부 앞이었는데 우리는 며칠 뒤 52연대 앞에 방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52연대는 조금 더 시골에 있었다
이사 올 때 너무나 부모한테 설움을 받고 나왔기 때문에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부대의 군인들이 갖다 준 옥수수 가루로 죽을 끓여 먹었다. 그렇게 11일을 먹고 나니 애기가 밤이면 자지 않고 울기만 했다. 웬일인가 했더니 젖이 나오지 않아서 애기가 울었던 것이다. 남편은 부대에서 식사를 하고 오기 때문에 모르고 있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쌀이 없어 그렇게 했느냐”며 야단을 치길래 쌀이 없으면서 있다고 해 놓고 다음날 사다 놓았다.
그 곳에서 몇 개월 살다가 양구 읍으로 이사를 했다. 애기 첫 돌도 양구 읍에서 지냈다. 그렇게 두 해쯤지나갈 무렵 어느 날, 옆 집에 살던 군인 가족이 병원을 가는데 따라 갔다. 나도 몸이 아프다 하니 진찰을 받아 보라고 해서 진찰을 했더니 감기 몸살이라며 병원에서 약을 주었다. 당시에 입덧을 하지 않아서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 약을 먹고 삼일 만에 하혈을 하기 시작 했다. 한약국을 갔더니 임신을 했는데 애기 유산기가 있다고 하면서 한약을 먹으면 괜찮 다고 해서 한약을 지어다 먹게 되었다. 한약을 먹으니 조금 나은 것 같았지만,그럭저럭 지내다가 6개월이 되었을 무렵 애기가 결국 유산이 되고 말았다. 죽어있는 애기가 나오지 나오지 않아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결국 부대의 군의관이 나와서 보게 되었는데, 이미 6개월이 지났으니 기계로 뜯어 내야 된다면서 수술을 해서 억지로 뜯어냈다. 나중에 보니 아이가 생길 것은 다 생겨 있었고 아들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화장실을 가는데 그 앞에 웬 아기가 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이어서 집으로 놀라 뛰어 가서 남편과 주인 아줌마에게 얘기를 했다. 주인 아줌마는 자기 친척이 애기가 없다면서 혹시 데려다 키울 것인지 물어보겠다고 하였다. 결국 그 아주머니가 애기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줌마는 애기가 너무 운다며 파출소에 데려다 주었다. 나중에 파출소에서 나를 찾아와 증인을 서 달라고 말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얘기는 아이가 화장실 앞에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럭저럭 양구에서 몇 년을 살 다가 1960년에 경기도 포천 2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에 5군단 사령부가 있었다. 양구에 있을 때 애기를 가져서 포천 2동에 와서 보니 그 이웃에 애기가진 사람이 다섯 집이 있었다. 세 집이 먼저 애기를 낳았는데 두 집은 아들을 낳고 한 집만 딸이었다. 남편은 “먼저 낳는 사람이 아들낳는 법이니 우리는 딸인가” 보다 하면서도, 퇴근만 하면 “아직 멀었냐”고 재우쳐 물었다. 딸 낳은 4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것이 태주이다.
군대 생활 하는데 따라 다니다 보니 아이 들 5남매가 출생지가 저마다 다 다르다. 큰 딸은 강원도 춘천이고, 큰 아들은 경기도 포천 2동이고, 둘째 아들은 경기도 파주이다. 작은 딸은 마산 창원이고 막내딸은 부산이다.
옛날에는 세탁기도 없고 고무장갑도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 앞에 콩나물 공장이 있어서 따뜻한 물이 나와서 빨래하기가 아주 좋았다. 둘째 애기 낳은 후 백일도 되지 않아서, 남편은 전라도 논산 육군 보병학교에 장교로 임관하기 위한 오비시 (OBC) 교육을 갔기 때문에 나는 애기를 데리고 고향에 가 있게 되었다. 남편은 3 개월 만에 교육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를 데리러 왔다. 그래서 다시 최전방인 강원도 동면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전근 발령이 나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고 문산 문정리라는 데로 이사를 갔다. 문산의 임진강까지 가려면 패스가 있어야 들어가게 했다. 그 곳에서 태주의 돌을 지냈다.
높은 사람들이 자기들 전근가면 꼭 남편을 데리고 다니려 하니 이사를 많이 하게 되었다. 한 곳에 정들만 하면 이사를 가야 했다. 문산에서도 채 2년이 못 되어서 또 경기도 파주 적성면으로 이사를 했다.
적성면에서는 날씨가 어찌나 추웠는지 애기를 낳은 방안의 물이 다 얼 지경이었다. 그 때가 둘째 아들인 태웅이를 낳을 때이다. 내가 애기를 낳는다고 했더니 시어머니가 구완을 해 주러 파주까지 오셨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그렇게 시집을 살리더니 작은 며느리를 보고 나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몸소 애기 구완을 해 주겠다고 그 먼 길을 오신 것이다. 그 동안 모진 시집살이를 했던 것만큼이나 더욱 고맙게 생각이 되었다.
애기 놓고 조리를 잘 못해서 그런지 애기를 낳은 후 5개월 쯤 되었을 무렵부터 허리가 아파서 너무나 고생을 했다. 하도 중세가 심해서 서울 성모병원 갔더니 척추 수술을 하고, 움직이지 않은채 3개월을 기부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 때가 내 나이 30일 때 였다. 그 때 돈으로 수술비가 삼십만원을 달라고 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수술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한 평생을 허리가 아파하면서 살아 왔다. 부대의 군의관들이 가끔씩 집으로 와서 치료를 해주었다.
애기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주 금촌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허리가 몹시 아팠는데, 또 한번 가래비 삼거리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남들은 군인 가족들은 편하다 하는데 곳곳마다 이사하기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있다가 큰 애 혜숙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다닌 후 시골 저희 할머니께로 보내었다. 시어머니는 예전에는 그렇게 시집을 살리더니 작은 며느리를 보고 나서 부터는 마음이 달라져서 손자도 시골로 보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창원으로 이사 할 때는 큰 아들도 고향으로 보내었다. 남편은 몇 년 동안 파주에서 근무하다가 마산 창원 신병 훈련소로 가게 되었다.
남편은 먼저 창원으로 가고 내가 애기를 데리고 혼자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전에는 이사를 해도 짐이 별로 없이 다녔는데 이번에는 부대의 목수 한 사람이 쌀 뒤주도 짜고 찬장도 짜 주고 해서 짐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새끼를 꼬아 놓으니 부대 군인 아저씨가 와서 짐을 싸서 김천 역으로 부쳐 주었다. 짐을 부친 후 김천 사촌 시누이 집에 가서 이틀 밤을 자며 기다려도 짐이오지 않아서 고향 거창으로 가서 이틀 밤을 더 자고 남편을 찾아 창원으로 갔다. 창원에서 하루 밤을 자고 또 짐 때문에 김천으로 갔는데 아직도 짐이 오지 않았다. 결국 시누이 집에서 기다리다가 짐을 찾아서 거창으로 부치고, 다시 거창 읍에서 짐을 찾아 고향 집으로 옮겨다 놓은 후 창원으로 갔다. 그 짐 찾는 동안 애기 데리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창원 훈련소 앞에 있는 소답 동네 한동안 살다가 얼마 후에는 창원 역전으로 이사를 했다. 역전에서 조금 살다가 그 다음에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하였고, 1966년 그곳에서 넷째 애기를 낳았다. 둘째 딸인 혜정이다. 애기 낳을 기미가 있는데, 남편은 내 친동생 (철이네) 결혼식 한다고 고향 거창에 갔다. 남편 오기 전에 애기를 낳으면 어떻게 할까 몹시도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애기 낳기 전에 남편이 왔었다.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오지않고 시누이가 산후 구완을 해 주러 와서 있었다.
애기 낳은 지 얼마 되지않아서 가까이 있던 백씨 집으로 이사를 했고 얼마 후에는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 돈 받을 집 옆에 있던 서씨집으로 이사를 했다. 창원에 사는 동안 만도 이사를 여러 번 하였다. 어느 덧 제대할 때가 되어서 고향으로 가려고 하다가 부산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제대 하기 전까지는 7남매의 맏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제대하면 집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는데, 농사지을 땅도 없이 고향으로 가면 아이들 공부도 못 시킨다는 생각에 결국 부산으로 옮기기로 결정을 하였다. 먼저 부산에 가서 동생도 만나고 두루 알아보고 돌아왔다.
1967년 남편이 제대한 후 내가 부산에 다니러 갔을 무렵 이모님께서는 집에서 파자마와 팬티를 가내공업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물건들을 창원에서 팔아 보려고 만들어 놓은 제품을 한 묶음 사왔다. 그 물건을 이고 큰 애는 손을 잡고 작은 애기를 업고 버스를 타고 창원의 다른 시장으로 갔다.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갔는데, 하루종일 기다려서 겨우 파자마 한 장을 팔고 왔다.애기 둘을 데리고 갔더니 과자 값이 더 많이 들어갔다.
그 다음날은 우리 마을의 집들을 다녔는데, 남의 집에 들어가다가 혹시 남자가 있으면 들어 가다가 돌아 나오고 개가 있으면 무서워서 나오고 하여 하루종일 다니면서 겨우 몇 가지를 팔고 왔다. 그렇게 이틀을 다니고 나서는 물건을 파는 것을 그만 뒀다.
며칠 있다가 남편은 부산으로 가서 방을 얻어 놓고 왔다. 당시 이웃 사람에게 곗돈을 타서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 나는 부산으로 가지 못하고 남편 혼자서 먼저 이사를 했다. 남편은 부산서 혼자 살고 나와 아이들은 그 돈 받들려고 이사도 하지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돈 빌려 가는 사람은 오늘 준다, 내일 준다 하면서 미루기만 해서, 5 개월이 지나도록 돈을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돈 받는 것을 포기하고 부산 남편한테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돈 받으려다가 양쪽에 방세만 주고 있었다.
부산에 와서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샀다. 셋집은 문현동인데 가게는 전포동 성북 초등학교 앞에 얻었다. 거리가 멀어서 다니기가 몹시 불편했다. 아침이면 남편은 부산진 시장 가서 물건 떼 오고, 나는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1원 짜리 풀 빵을 구어 팔았다. 아침 일찍 연탄 불을 피워서 화로에 담아 이고 가게로 나갔다. 애기는 업고 큰 애는 걸리고 가서 학생들 오기 전에 문을 열어야 했다. 그리고 팔던 물건은 가게에다 두지 못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이고 와야 했다.
어찌나 장사가 잘 되는지 물건을 해다 놓으면 순식간에 다 팔렸다. 1원짜리를 하루 종일 팔면 3천원, 4천원이 넘었다. 물건 하러 갈 때에는 2천원만 하면 물건하고 남았다.
1968년에는 고향에 보냈던 큰 애 둘도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 그 때 제일 큰 애가 초등학교 졸업반이었다. 큰 애를 중학교 보내려고 데리고 왔다. 남의 집에 살다 보니 주인도 천층 만층 이었다. 부산에서 세 들어 살던 집에서는 아이가 중학교 시험공부 한다고 불을 켜 놓고 있으면 전기 계량기를 내려 버리곤 했다. 아침에 새벽 밥을 하려면 부엌에도 촛불을 켜야 했고, 공부도 촛불을 켜고 해야 했다.
그렇게 장사를 하는 중에 하루는 창원에 빚 받으러 갔다 왔더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 때는 옷이 귀해서 제대할 때 양복 한 벌 맞춰서 걸어 놓았었는데, 그 옷도 가져가 버렸다.
도둑을 맞고 나서 그 다음 날 가게를 가려고 하는데 나이 여섯 살 된 작은 아들이 도둑이 옷을 훔쳐 가고, 이불도 가지고 가니 집을 지키면서 도둑을 잡겠다고 가게에 안 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방 문을 잠근 채 아이를 혼자 두고 가게를 나갔다.
아침에 큰 공기에 밥을 담아 놓고, 아침에 반만 먹고 낮에 먹으라고 해놓고, 아침에 나갔다가 밤 9시가 넘어 집에 오면, 밖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문을 두들긴다. 그러다가 들어 가면 “엄마! 오늘은 불을 늦게 켜 주어서 많이 울었다”라고 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엄마! 오늘은 조금 울었다”고 한다. 방에다 여섯 살 먹은 아이를 혼자 두고 20 일을 넘게 문을 잠가 놓고 다녔더니 아이 얼굴 축이 났다 (여위었다). 그래서 할 수 없어 가게 옆에 월셋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가게 옆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게에 왔다가 학교 운동장을 뛰어 다니곤 했다.
그렇게 키운 아들이 계속 올바르게 잘 자라서 중학교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서울 법대 들어가서도 장학금 받아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까지 하게 되어서 얼마나 감개가 무량했는지 모른다.
내가 가게를 보는 동안 남편은 물건만 해다 주고, 낮에는 당시에 처음 나온 스텐 그릇을 지고 다니면서 팔고 왔다. 어찌나 잘 팔리는지 남편은 그릇장사에 재미가 있어 했다. 낮에는 스텐 그릇을 팔고 와서 저녁에는 길거리에서 책을 펴놓고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하다가 1968년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어 예비군 중대장을 하게 되었다.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집안 일을 돌봐 주기도 했다. 나는 계속 아이들을 데리고 풀 빵을 구어 팔았다. 초등학교 아이들 상대로 장사를 해보니 어린아이들이 돈도 내지 않고 물건을 들고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장사가 잘 되어 이듬 해인 1969년 봄에는 가게 근처에 집을 하나 마련했다. 그 때 돈으로 십팔만 원을 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가게 딸린 집을 삼실칠 만원에 사서 이사를 하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포동의 고지대에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가게는 학교 앞보다 한결 큼직했다. 그 집에서 잡화 가게와 막걸리 직매소를 했다. 팔 물건을 멀리 시장에서 떼다가 머리에 이어 집까지 나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남편은 아침이면 막걸리를 물지게로 짊어지고 가게마다 배달을 했다. 아침에 배달하고 낮에도 배달해 달라고 하면 배달을 해 주었다.
어느 날 오후에 배달 주문이 와서 술 닷 되를 통해 담아 내가 이고 가려고 하는데, 둘째 아들이 학교에 갔다 와서 “제가 배달을 다녀 올게요” 하고는 땀을 흘리면서 닷 되들이 술통을 메고 갔다. 그런데 그 집에 도착하여 술통을 여니 날씨가 더워 술이 넘쳐 내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가게에서는, 열한 살 된 아이가 메고 간 술을 돌려 보냈다. 얼마나 속상하던지 술통에 막걸리 한잔을 더 부어 채운 다음 내가 이고 가려 하니, “엄마가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제가 가겠다고 했다. 아이는 무안하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술통을 메고 배달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아이의 아빠에게 이야기해도 될 일을 그렇게 까지 하는 사람이 다 있었다. 장사를 하다 보니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가게에서 연탄도 팔고 여러 가지 잡화 장사를 했다. 당시에는 돈을 버는 것이 너무 절박했지만 왜 그렇게 지독하게 했는지 후회가 되는 일도 많다. 사다 먹는 사람들은 좋은 것만 사 먹는데, 돈이 무엇인지 나는 자식들에게 상한 것만 골라서 주고, 과일도 상한 것을 그 부분만 잘라내고 먹게 하고, 빵도 변질된 것을 곰팡이를 떼 내고 쪄서 주고, 반찬도 팔면서 재고 남는 것을 먹게 했다. 도시락 반찬으로 재고로 남은 오뎅을 볶아서 넣어 주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싶어 안타깝다. 그렇게 자란 아들 딸들이 “엄마!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마시라”며 말하곤 한다.
막내 애기 혜미를 1970년 동짓달에 그 집에서 낳았다. 장사를 하니까 애기 놓을 기미가 있었는데, 장보는 일을 거를 수가 없어서 시장에 가서 물건을 해서 이고 왔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애기구완 해 준다고 와 계셨다. 물건을 해다 놓은 그 날 밤에 애기를 낳았다. 혜미를 낳고 사흘 만에 나가서 가게도 보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또 시아버지 모시고 장사를 했다. 애기를 업고 다니면서 물건도 해 오기도 하고, 시아버지에게 아이를 보게 하고 물건 하러 갈 때도 있었고 이웃사람에게 맡길 때도 있었다. 그럭저럭 장사를 계속 했다.
큰 딸이 대학 졸업반 일 때는 학점을 미리 다 따서 졸업도 하기 전에 울산에 있는 울산중학교로 발령이 나서 1978년 8월부터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다음 해 2월에 졸업식을 했다. 학교 나가는 동안 과외 수업도 했다. 그렇게 해서 월급은 집에 갖다 주고, 과외한 돈은 동생들 용돈도 주고 제가 쓰기도 했다.
그 해에 대학에 들어 간 큰 아들도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큰 아들은 이제 저희들이 버니까 아버지에게 “엄마 장사 시키지 말자”고 말했다. 모두가 장사를 못하게 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사를 그만 두었다. 장사를 할 때나 안 할 때나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큰 딸은 중학교 교편을 잡아서 선생님으로 근무하였고, 같은 학교에 다니던 선생님과 결혼을 시켰다.
남편은 향토예비군 창설 때부터 시작하여 예비군 중대장을 계속하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무렵인 1980년도에 현역에게 중대장을 시킨다고 해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데 길거리에 쓰레기 줍는 사람도 퇴직금을 주는데, 13 년을 근무했는데 퇴직금도 없이 그대로 내쫓았다. 남편은 군대생활 한 것과, 예비군 중대장 한 것을 치면 한평생을 국가에 바치며 다 늙었는데,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어서 충격이 컸다.
작은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같은 학교의 한 학부모가 담임 선생님에게 자기 아이와 공부를 함께 할 착한 학생을 말해 달라고 한다면서 담임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그 집으로 가서 함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권했다. 선생님이 간곡히 부탁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가기로 했다. 그 집 아들과 몇 달 동안 같이 지냈는데, 같이 공부도 하면서 집보다 잘 해 준다면서도 아이의 얼굴이 축이 났다. 그래서 몇 개월 지나고 나서 보내지 않았다.
당시 아들이 가 있던 집의 주인은 샤시 공장의 사장이었다. 남편이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해서 일을 시작할 무렵, 그분이 “아들을 보니 그 아버지도 좋은 분이 틀림없다”면서 자기네 회사로 오라고 했다. 아들 인연으로 남편은 그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아들은 1981년에 서울법대에 합격을 했다. 그 때만 해도 서울대학 갔다고 모두 부러워해서 술도 많이 냈다. 아들이 서울대 입학하던 해에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옛날 군대생활 할 때 아들 낳았던 곳인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으로 찾아 갔다. 당시 아들을 낳던 집의 주인 아저씨는 돌아 가셨다 했고 주인 아줌마는 이사를 가고 다른 사람들이 살고있었다.
그 주인 아줌마, 아저씨는 너무나 좋은 분이었다. 자기는 애기도 낳아 보지도 못한 사람이 내가 애기를 낳았을 때 자기 일처럼 좋아 했다. 내가 애기 낳고 감기가 들어 기침 하느라고 잠을 못자고 있던 어느 날에는 먼 곳에 있는 약국에 나를 위해 약을 지으러 가면서, 저녁 때 혼자 가면 무습다고 여섯 살된 애를 데리고 가더니, 오는 길에 애를 업고 업힌 애기는 추워 떨고, 어른은 땀을 흘리면서 돌아 왔었다. 약을 지어 밤 늦게 돌아 와서 한 밤중에 자기네 화로불에 약을 달여 주고 자러 갔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시어머니가 와 있으니 엄두도내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게 고마운 분 이였다. 우리에게 그렇게 잘 해 주었던 아줌마가 없으니 너무 섭섭했다. 앞으로라도 기회만 된다면 텔레비전에 나가서 그 때 그 사람을 찾아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웃 사람들이 서로 자기집으로 오라 해서 그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서 이사 나와 20 년 만에 아들을 서울대학에 입학시키고 찾아 갔는데 여러 사람들이 반겨주고 반가와 해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들은 1984년 대학 4학년 때 총학생회장이 되었는데 활동을 하다가 학내 프락치 사건으로 연루되어 졸업을 3개월 앞두고 법대에서 제적이 되고 수배가 되었다. 수배되어 있는 동안 담당 형사가 매일같이 집에 와서 자수를 시키면 어느 여관에 가서 자기가 조사하고 보내준다 하면서 매일같이 와서 나를 꼬드겼다.
그래서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아이의 아빠에게 이야기해서 형사를 데리고 서울까지 저의 아빠와 함께 아들 있는 곳을 찾아 갔다. 형사와 같이 아들이 피신해 있던 집을 찾은 후 형사는 여관방에서 기다리고 우리는 아들을 데리고 형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랬더니 그 형사는 우리 모두를 자기 이종 형 집으로 간다며 데리고 갔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 그 곳은 또 다른 형사의 집이었다.
두 형사가 밤새도록 조사를 하더니 아침에는 경찰서에 데려 갔다 온다 하였다.처음에는 엄마도 같이 가자 하더니, 나중에 나갈 때는 경찰서에 데리고 갔다가 돌아 온다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들은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신길동에 임시로 지내고 있던 자취 집에 가서 짐을 챙겨 가지고 신림동 자취 집으로 가라고 했다.
아들을 경찰서에 보내놓고 짐을 챙겨 아들 자취 방에 갔다 두고 저의 아버지는 부산 집에 가시고 나는 아들 자취방으로 갔다.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고 있는데, 저녁 라디오 뉴스에 경찰이 아들을 검거했다고 방송에 나왔다. 우리가 자수를 시킨 것이 분명한데 터무니없는 소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형사는 우리 아들을 구속시키고 일계급 특진하고, 상금으로 그 때 돈 백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그 방송을 듣고 아이의 아빠는 “부모가 잘못해서 아들을 구속시키게 되었다”며 “자살이라도 해야 한다”고 한탄을 했다.
우리가 그렇게 아들을 경찰에 자수 시킨 뒤 결국은 재판을 받고 1년 형을 받았다. 그 아들은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시간을 겪었지만, 결국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해서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하면서 국제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지금은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법대 교수를 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동안 서울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아이 아버지는 면회도 다니고 재판 받는 것도 보고 했는데,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혈압이 많이 올랐다. 그러다가 결국 혈압으로 56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에는 내가 주로 면회를 하러 다녔다. 하루는 병산 동생네 잔치가 있어 나는 하루 먼저 거창으로 가고 남편은 다음날 잔치를 보러 왔다. 잔치보고 난 후 남편은 당일에 먼저 부산으로 내려 갔다. 남편은 부산으로 내려 가면서 “구속된 아들 걱정 하지말고 친정에 잘 있다 오라”고 하였다. “내일 국회 개원하는 날이라 개원하고 나면 아들은 나올 거야” 말하였다. 나는 남편과 같이 부산으로 내려 가려다가 친정엄마가 편찮다 해서 형제들과 함께 병원에 가보려고 동생 집에서 자고 친정으로 갔다.
그런데 친정에 도착하자 말자 올케가 “어제 백서방 갈 때 같이 부산에 가지 그랬어”하면서 백서방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병원에 갔다 왔다고 했다. 전화를 바꾸라 하니, 옆에서 괜찮다고 하면서 전화도 받지 않고 내일 오라고 하는 소리가 전화에 들렸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대 조금 지난 후 큰 딸이 “아버지가 병원에 갔으니 엄마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 전화를 받고 택시 불러놓고 언니와 오빠, 울산 동생과 같이 한참을 걸어 내려 오다가, 택시를 타고 부산 침례 병원으로 갔다. 정문에 들어가니 친척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언니가 먼저 문을 열고 “어떠냐”고 하니 사촌동생이 “운명하셨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영안실에 들어가 보니 남편은 자는 것처럼 누워있었다. 그것을 보고 또 내가 쓰러졌다. 사람들이 다시 나를 흔들어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남편을 집으로 모시고 가자”고 했다.그래서 집에 와 있다가 4 일장으로 장례식을 하게 되었다.
아들이 구치소에 있어서, 변호사에게 연락을 하고, 같이 수감되어 있는 학생들의 학부형들에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렸더니, 남편에 대한 얘기가 신문 기사로 나와서 전국이 다 알게 되었다. 아들로 인해 서울 대학에서도 조문이 오고 사방에서 조문 꽃다발이 수없이 많이 들어와서, 장례식 할 때 꽃다발을 한차 싣고 갔다. 아들이 올까 봐 입관할 때 관을 꼭 닫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관식 할 때까지 아들이 나오지를 못해서, 결국 관을 닫게 되었다. 초상을 친 날 저녁때가 되니 서울에서 아들이 임시로 석방이 되어 부산 집으로 온다고 연락이 왔었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온 친구들 9명과 교도관 2명이 같이 왔었다. 교도관들은 집에 와서 상황을 보더니 다른 데로 가서 기다렸고, 다음날 삼우제 지내러 버스를 대절해서 고향 산소에 의식을 치른 후, 교도관들은 고향 거창에서 아들을 데리고 서울 영등포 구치소로 돌아 갔다. 아들은 감옥에다 가두어 놓고, 몇 십 년 동안 함께 살던 남편 마지막 가는 것도 못보고 말았지만, 나는 5 남매를 데리고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살아야 했다. 작은 아들은 1년 형을 살고 나와서도 활동을 계속하여 그 후에 또 수배가 되었다.
작은 아들이 고등학생 일 때, 큰 아들은 부산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1979년에 큰 아들은 대학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유인물 배포하다가 걸려서 4 일간 구류를 살고 나왔다. 나는 4 일을 꼬박 굶고 다녔는데도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다행히 큰 아들은 부산대학교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무사히 잘 졸업했다. 그 시절에는 석사졸업 하고 시험을 쳐서 6 개월간 장교로 군대생활을 하는 제도가 있어서, 서울 대학에서 시험을 쳤다. 서울서 학교 다니던 제 동생이 저의 아버지 회사에 전화를 해서 합격했다고 연락을 했더니, 저의 아버지는 얼마나 기뻤는지 바로 집으로 전화를 하면서 너무 반가워서 목이 매인다고 말하였다. 큰 아들은 대구 영천 3 사관학교에서 6개월 만에 제대 할 때 소위 계급을 달았는데 계급장을 부모가 직접 달아주게 하였다. 그래서 한 쪽은 저희 아빠가 달고 또 한쪽은 내가 달아 주었다.
제대 하고 나서 저의 대학원 교수님이 울산 현대 중공업에 취직을 주선하여 취직되는 것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있는데 저의 아버지는 56세의 나이로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은 제대해서 취직을 할 참이었고, 작은 아들은 서울 법대 졸업반이었고, 둘째 딸은 막 대학에 입학하고 막내 딸은 중학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아이들 아버지가 돌아 가신 것이다. 아들 딸 5 남매를 낳아 키웠는데, 그 중 큰 딸 하나 결혼 시키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먼저 가고 나니 처음에는 못살 것만 같더니 세월이 약이었다.
큰 아들이 취직을 해서 저의 아버지 49 젯날 첫 월급을 타 왔다. 그래서 그 돈으로 비단옷 한 벌을 사다가 상위에 올려 놓았다가 산소에 가서 태워 주었다. 아들은 울산현대 중공업에 다니면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살림은 울산에서 시작했다. 아들은 울산 현대 중공업에서 5 년 동안을 근무하다가 창원 삼성 중공업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영어 시험을 보고 해외 지사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작은 아들은 1985년에 석방된 뒤 또 운동을 하다가 수배가 되어, 저의 형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했다. 7년 동안이나 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집에다 도청을 해 놓아서 아들과는 연락 한 번 못 하고 지냈다. 아들이 구속되어 있을 때 구속자 가족모임이 있어 서울을 왔다 갔다 할 때에는 아들이 보고 싶어, 학생들만 모여 있으면 다 내 아들인가 하면서 자세히 쳐다보곤 했다. 작은 아들이 서울에 있는 동안 나는 집에서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작은 딸은 대학졸업 해서 서울로 취직을 했다.
작은 아들은 수배되어 있는 중인 1989년에 서울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밤차를 타고 가서 약혼식을 시켰다. 그러다가 1992년 봄 창원 큰 아들 집에 있는데 아들이 사노맹 조직으로 잡혔다는 소식 연락이 왔었다. 천지가 내려 덮치는 것처럼 떨렸다. 부산을 거쳐 서울로 달려 갔다. 가서 보니 며느리도 같이 안기부에 잡혀갔다는 것을 알았다. 밤 늦게 큰 사위와 함께 안기부를 찾아 갔다. 밤 새도록 안기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에 면회 시켜달라고 하니 “면회가 안 된다”고 했다. 매일 같이 가서 싸우다가 일주일이 지나서 면회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경들과 싸우다가 방패에 마자서 쓰러 지기도 하고 백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었다.
그때는 서울에서 생활을 많이 했다. 막내 딸 혼자 집에 있었다. 안기부 앞에도 가고, 검찰청에도 가고, 법원에도 가고, 날마다 쫓아다녔다.안기부에서 근 한 달 동안 조사를 받고, 또 구치소로 넘어가서 검찰에 다니면서 조사 받았다.
나중에 재판을 받았는데, 검사의 구형이 사형이었다. 자식이 사형구형을 받고 나니 천지가 내려 덮는 것만 같았다. 선고 재판에서는 무기 지역이 내려졌다. 그 후에 항소심 재판에서 15년 형이 확정 되었다.
나는 아들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날마다 면회를 다녔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들이 안양 교도소로 넘어갔다. 안양교도소에서 거의 일년을 있는 동안에도 날마다 면회를 다녔는데, 하루는 면회를 갔더니 “면회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싸우다가 면회도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다시 면회를 갔더니 아들이 강원도 원주 교도소로 이감을 갔다고 했다. 그렇게 이감을 시키느라고, 그 전 날도 면회도 안 시키고 말도 없이 보낸 것을 알고 너무나 속이 상했었다.
안양 교도소에 소장실에 찾아 갔더니 소장이 없어 책상만 치다가 보안 과장실로 들어 가려고 하는데 교도관들이 제지하며 문을 닫는 바람에 손목을 다쳐 지금까지 흉이 남아있다. 아들이 원주교도소로 간 뒤에는, 민가협 활동을 하면서 서울에서 면회하러 가기도 하고, 부산에서 원주까지 직접 면회하러 가기도 했다. 부산서 새벽 에 출발해도 면회하고 돌아 올 때는 막 차로 와야 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면회를 하고, 서울 민가협 활동도 하고 부산에서 민가협 회장까지 하게 되었다. 아들 면회하랴, 민가협 활동하랴 늘 바쁘게 다녀야 했다.
학생회장 때 1년 감옥살이 하고는 또 7 년을 수배생활 하다가 다시 구속이 되어서 15 년 형을 받고 92 년에 감옥에 가서 다시 7년을 살았으니, 도합 8년을 감옥살이 하다가, 98년 8월 15일 날 김대중 정부에 의해 8.15 특사로 나왔다. 아들이 감옥에서 나오자 오래지 않아 결혼식을 시켰다.
아들이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안기부도 가고, 검찰청에도 가고, 법원에도 가고, 국회도 가고, 법무부에도 가고, 안 다닌 데 없이 다 다녔다. 민가협이라는 단체는 어디라도 찾아 다녀야 했다. 청와대도 찾아 갔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김영삼씨 집에서 식사도 하고, 김대중씨 집에 가서도 식사하고 왔었다. 예전에 노무현 현 대통령 집에 가서도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자식을 키워서 8년을 감옥에다 넣어 놓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남들 부럽지 않게 아들 딸을 올바르게 키운다고 했는데, 시국이 들어서 수배생활 7년, 감옥생활 8년, 15년을 속태우고 살아왔다. 그 기간 동안 우리 막내딸을 집에다 혼자 두고 다닌 것이 무엇보다 죄스러웠다.
이제는 그 아들이 감옥에서 나와 미국 유학 가서 석사 학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밟고, 국제 변호사 자격증까지 따 놓고, 지금 현재는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유비시) 에서 법대 교수를 하고있다. 며느리도 함께 고생을 하다가, 미국에서 공부해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다. 이제는 너무나 마음이 흐뭇하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어도 남편 생각이 나고, 나쁜 일이 있어도 남편 생각이 난다. 아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막내딸과 같이 살면서, 막내 딸 학교 보내 놓고 낮이면 큰 딸 집에 애기 봐 주러 다녔다. 다른 때는 괜찮은데 아들 딸 결혼시킬 때가 제일 속상했다.
둘째 딸은 결혼식을 하고 서울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막내 딸을 데리고 살았다. 저의 아버지 돌아 가시기 전에 3층 집을 지었는데 막내 딸만 데리고 살려고 하니 너무나 호젓하였다. 하지만 딸이라도 있으니 그럭저럭 살지 막내 딸까지 시집 보내고 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 딸도 학교를 마친 후에도 그럭저럭 지내며 한방에서 자다가 막내 딸 까지 결혼해서 시집을 보내고 나니, 저의 아버지 돌아가실 때나 마찬가지 였다. 시집을 보내놓고 저녁 때가 데면 “엄마!” 하면서 들어올 것만 같았다.
몇 년을 혼자 지내다가 막내 딸이 애기를 낳아 딸의 집에 가서 구완을 하다가, 딸네가 우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집에 와서 4년을 함께 지내다가, 둘째 애기를 갖고 이사를 가려고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네 살 된 손자 찬빈에게 저의 엄마가 “이제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 갈거야” 하면서, “할머니는 혼자 살아야지” 했더니 네 살짜리 손자가 “할머니 혼자 무서워서 어떻게 해” 하면서, “할머니도 같이 가면 되지”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다가 딸 네가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이사 가서 둘째 애기 가은을 낳았다. 내가 애기 놓고 조리를 잘 못했기 때문에 딸은 조리를 잘 해 주려고 했는데, 딸이 애기 낳을 무렵 내가 팔이 아파서 구완을 못해 주었다.
아들딸 5 남매를 키우면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좋은 일이 더 많았다. 그 뒤로는
혼자 살면서 딸 집에도 가고 형제 집에도 다니면서 지냈다.
III.
<1994년 시카고 여행 – 2004년 밴쿠버>
큰 아들이 창원 삼성 중공업에 다니다가 해외 지사 파견 직원으로 외국에 나가 있어서, 1994년도에 처음 미국에 가 보게 되었다.
서울 김포 공항에서 출발해 미국 시카고까지 가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가야 하는데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 해서 보니 짐이 오지 않아서 짐을 찾다가 시카고 가는 비행기를 놓쳤다. 그래서 혼자 얼마나 애타도록 찾다가 한국 직원을 찾아가서 짐이 없다고 말했더니 자기들이 찾아 보겠다고 먼저 가라고 하면서 비행기를 안내해 주었다. 내가 비행기를 놓치는 것보다 아들이 공항에 나와서 너무 기다리게 될까 봐 걱정을 하고 직원을 시켜서 시카고로 전화를 해달라고 말했더니, 마침 아들 네가 아직 공항에 나오기 전에 연락이 되었다.
다음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 공항에 도착하니 아들 식구가 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짐을 찾아 보니 짐이 먼저 와있었다.서울에서 부칠 때 시카고로 바로 부친 것을 모르고 그렇게 애를 태웠던 것이었다. 아들 식구와 같이 짐을 찾아서 밤늦게 아들 집으로 갔다. 그리고 사흘 만에 아들이 휴가라서 여행을 갔는데, 시차 때문에 며칠 동안 힘이 들었다. 처음에 미국 워싱턴으로 갔다가 옐로 스톤으로 갔더니 온천 물이 너무 좋았다. 며칠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구경도 많이 하고, 아들 식구들과 같이 다니고 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에 장사 한다고 고생만 하고 돌아 가신 남편 생각을 하니 무엇보다 속상했다.
시카고에 있으면서 아침이면 잔디밭에 산책도 많이 했다. 잔디밭에 산책을 나가면 잔디밭에 토끼들도 뛰어 다니고, 청동 오리 떼들이 잔디밭에 앉았는데, 오리가 어찌나 큰지 날지를 못할 정도였다. “한국 같았으면 청동 오리라고 다 잡아 먹었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오리를 보는 것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시카고에서 3개월 동안 있다가 한국에 돌아갔다. 그리고 일 년 후인 95년도에 또 미국으로 갔다. 이번에는 아들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로 구경을 갔다. 디즈니월드도 보고 몇 일을 다니면서 구경을 참 많이도 하고 재미있게 다녔다.
미국을 거의 해마다 가다시피했다. 구경을 다니면서도 작은 아들이 구속되어 있으니 다니면서도 항상 마음이 꺼림직 했었다. 미국에 간 것이 음력 5월 달이었는데 추석이 되어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 가려고 하니, 며늘아기 하는 말이 “제사 때문에 가려고 하느냐”면서, “하늘도 하나요, 달도 하나, 해도 하난데, 돌아가시면 하늘나라로 간다 하는데 조상님들이 하늘 나라에서 날아 오시겠지요” 하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추석 제사를 미국에서 지내고 5개월 넘어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 왔었다. 몇 년을 혼자서 제사를 지내다가 아들 며느리 손자들과 같이 제사를 지내니 마음이 참 편안했다.
작은 아들은 미국에 유학가서 공부를 마치고 석사학기를 받는다고 해서 1999년 봄에 사돈 내외와 함께 졸업식에 갔었다. 석사 학위 졸업식이 사흘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얼마나 질서있게 잘하는지 구경이 너무 좋았다. 졸업식 마치고 다음날 아들 며느리 다 같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 한다고 2박 3일간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노틀담 대학 주변을 아들 며느리와 함께 다녔다. 그리고 아들 부부가 우리 오면 여행 보내려고 미국 엘에이에 있는 관광 회사에 한국 사람들과 함께 여행가는 데 패키지를 사서 사돈 내외와 함께 가도록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놓았었다. 그래서 엘 에이로 가서 관광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여행 온 사람도 있고 이민 와서 사는 사람들과 다 함께 섞여서 같이 가는데, 60명 타는 관광차에 55명이 타게 되었다. 일주일을 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남편은 아들 딸 키운다고 고생만 하고, 자식들 길러서 영화도 못보고 남과 같이 구경 한 번 못해 보고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좋은 일을 보아도 마음 아프고 나쁜 일을 보아도 속상한다. 같이 낳은 자식인데 나 혼자 호강을 받으려고 하니 얼마나 속상한 지 이 말을 누구에게 다할까 싶다.
혼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아들딸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명절 때 가 데면 혼자서 몇 년을 제사를 모시려 하니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시카고 있던 큰 아들이 요즘에는 싱가폴에 살고있다. 지난 2002년도 12월 달에는 싱가폴 큰 아들 집에 가서 큰아들 집에서 아들 손자 며느리 다 같이 설 제사를 지내고 봄에 한국에 돌아왔다. 함께 제사를 모시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한국에서 몇 개월 지내다가 또 2003년 6월에 미국 보스톤에 살고 있던 작은 아들 며느리가 애기 낳는다고 해서 그 한 달 전에 미국으로 갔다. 아들은 하버드 대학에서 비지팅 스칼라로 논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던 다음 날부터 하버드 대학으로 아침마다 산책을 했다.
한 날은 산책 갔다가 한국에서 온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도 딸이 애기를 낳으면 구완한다고 왔었다. 그래서 같이 아침마다 하버드 대학으로 해서 학교 뒤 편에 있는 찰스강이까지 산책을 했다. 친구를 만나서 두 달 동안 산책도 하고 재미 있게 지내다가 8월 말에 아들이 캐나다 밴쿠버 유비시 대학에 법대 교수로 오게 되어 함께 이사를 해서 오게 되었다.
이사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추석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 제사는 캐나다 작은 아들 집에서 모셨다. 캐나다에 왔더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산책길이 너무 좋아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아침마다 산책을 하고 낮에도 한국 분들과 같이 오솔길을 돌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 해보니 외국을 많이 다니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미국 큰 아들 집이 있던 시카고에 가 보았고, 아들 식구와 같이 워싱턴도 가고, 옐로 스톤에도 가보고, 디지니월드도 갔다. 그리고 나서 태국에도 가고, 싱가폴도 가고, 홍콩도 가고, 말레이지아도 가고, 작은 아들이 미국 인디아나 사우스벤드에 살 때 아들 석사 졸업 한다고 가서 관광도 많이 하고 왔다.
몇 년 전에 우리 친정 형제 8남매가 부부 동반해서 호주와 뉴질랜드에 관광도 갔었다. 우리 형제들만 7박 8일을 갔더니 너무 재미가 있었다. 엘 에이도 가 보았고, 샌프란시스코에도 가고, 라스베 가스에도 가고, 2002년도에는 일본에 갔다 와서 한달 있다가, 싱가폴 큰아들 집에 가서 설을 쉬고 2003년도에 돌아 왔다. 그리고 또 몇 개월 있다가 6월 달에 미국 보스톤 작은 아들 집에 며느리가 애기 낳을 때 가서 뉴저지와 뉴욕에도 가고, 뉴욕 올바니 라는 데는 아들 변호사 선서식 한다고 갔다. 며느리 애기 낳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아들과 같이 갔었다. 변호사 선서식에 가서 보니 그곳은 정말 자랑스러운 자리였다.
6월 달에 보스톤 와있다가 8월 31날 그렇게 고생했던 아들이 캐나다 밴쿠버 유비시 대학에 교수로 오는데 같이 왔다. 캐나다에 와서 6개월 동안 있으면서 온 식구가 같이 다니면서 구경도 많이 하고, 외식도 많이 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마다 공원 오솔길로 산책도 많이 했다.
어려서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아들 딸 키운다고 못 배우고 육십이 넘어서야 겨우 제대로 글을 배우기 시작해서, 6개월 동안 밴쿠버에 있으면서 글을 많이도 썼다. 그리고 박경리의 소설 <시장과 전장>이라는 책도 읽고, 또 박완서 소설전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책을 읽었다.
젊어서는 무엇을 하느라고 못 배우고 칠십이 너머 글을 쓰고 있나 생각하니 새삼 속상해 하면서, 말이 잘 되지도 않는 글을 쓰기도 했다. 세월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6개월이 다 지나가고, 한국에 들어가려고 하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 동안에 아들 며느리에게 폐도 많이 끼쳐 주었다.
캐나다 와 있으면서 내 살아온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 시절에는 무엇을 하다가 글 한자 못 배우고 육십 줄에 들어 와서야 글을 배우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제 칠십 두 살이 되어서 캐나다에 와서 글을 쓰며 옛날 삶을 돌이켜 보니 허망하게 살아온 것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어떻게 해야만 즐겁게 살 수가 있을까 좀 더 열심히 생각해 보아야 겠다.
2004년 2월 26일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밤에